군체 영화 리뷰 (집단지성, 좀비진화, 연상호 감독)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저는 친구와 영화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나온 좀비 영화라는 소식에 마음이 동해서 서둘러 조조로 예매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무서운 좀비 영화가 아니라, 좀비가 실시간으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게 정말 가능한 설정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거든요.

집단지성 좀비, 황색 망사 점균에서 시작된 공포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이미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친구가 조금 늦는 바람에 앞부분 일부를 놓쳤는데, 그럼에도 스크린이 주는 몰입감은 집에서 OTT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팝콘을 한 움큼 집어들 새도 없이 이미 극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으니까요.
군체가 다른 좀비 영화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감염체의 설계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체인스 바이오 컨퍼런스 장면에서 소개되는 것이 바로 폴리세팔로 황색 망사 점균, 학명으로는 피사룸 폴리세팔룸(Physarum polycephalum)라고 합니다. 여기서 점균이란 뇌도 신경계도 없는 단세포 유기체임에도 불구하고, 개체 전체가 마치 하나의 판단 기관처럼 최적화 행동을 보이는 생물을 의미합니다.
이건 영화가 만들어낸 가상의 설정이 아니라고 하네요. 실제로 일본 나카가키 토시유키 연구팀이 2000년 발표한 미로 실험에서 점균은 미로의 모든 경로를 탐색한 뒤 최단 경로만을 스스로 남겼습니다. 먹이가 있는 구간으로 영양분이 집중되면 해당 통로가 굵어지고, 쓸모없는 경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방식이죠. 이 연구 결과는 이후 도쿄 지하철망 설계 효율 비교 실험으로도 이어졌을 만큼 학문적으로 검증된 사례입니다(출처: Science, Toshiyuki Nakagaki et al.).
군체 속 감염자들은 바로 이 원리를 따릅니다. 균사체(菌絲體), 쉽게 말해 균류가 뻗어나가는 실 모양의 구조체가 감염자들 사이를 연결하는 생체 네트워크로 작동합니다. 한 개체가 습득한 정보, 예를 들어 "저 불빛은 위험하지 않다"거나 "저 사진 속 형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이 네트워크를 통해 군체 전체로 실시간 전파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생존자들이 좀비를 유인하기 위해 사람 사진을 들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 한 마리가 그걸 학습하고 무리 전체가 업데이트되는 장면이었어요. 과연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너무 초조했습니다. 킬링타임용 좀비 영화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예상보다 훨씬 정교한 설정에 당황했네요.
군체형 집단지성(Swarm Intelligence): 중앙 리더 없이 개체 간 정보 공유만으로 전체가 최적화 행동을 보이는 현상
생체 네트워크(Biological Network): 균사체가 매개가 되어 감염자끼리 시각·청각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군체 내 통신 구조
이족보행 → 사족보행 역행 → 사진과 인간 식별: 영화 내에서 단계적으로 묘사되는 좀비 진화 과정

연상호 좀비 영화의 진화와 아쉬운 점
부산행, 반도, 그리고 군체 등 연상호 감독의 좀비 유니버스는 회차마다 공간적 설정이 달라집니다. 부산행은 기차, 반도는 한반도라는 고립된 평면 공간이었다면, 군체는 초고층 빌딩이라는 수직 공간을 택했습니다. 이 선택이 상당히 영리하다고 느꼈습니다. 층을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고, 그 사이 좀비의 진화 단계가 달라져 있는 구조는 단순한 도망극이 아니라 매 층이 새로운 변수인 게임처럼 긴장을 끌어올렸지요.
연상호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명확히 집중한 것은 좀비 자체입니다. 부산행 때 마동석이라는 육체적 해결사가 있었다면, 군체에서는 그 역할을 할 인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게 의도적입니다. 좀비를 학습하는 존재로 설정한 이상, 힘으로 뚫리는 구조를 반복할 수 없었겠죠. 그런데 동시에 이 지점이 아쉬움으로도 남습니다. 연상호 감독 특유의 방식에서 관객이 쾌감을 느끼는 부분이 어느 정도 희석된 느낌이랄까요.
서영철이라는 인물의 동기도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인간을 다음 단계로 도약시키겠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인데, 이는 19세기 사냥 채집 인류가 언어와 집단 소통을 획득하며 문명을 이룬 인지혁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설명한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 즉 인간이 집단 허구를 공유함으로써 대규모 협업을 가능케 한 인류사의 도약과 서영철의 논리가 겹쳐 보였습니다(참고: 유발 하라리, Sapiens 공식 사이트). 물론 그의 방법론은 완전히 다른 방향이지만요.
앤트밀(Ant Mill) 현상도 눈여겨볼 만한 설정입니다. 앤트밀이란 선두 개미가 자신이 남긴 페로몬 흔적과 만나버릴 때 무한 루프에 빠지는 현상으로, 탈출 신호를 줄 개체가 없으면 개미 군체 전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 원을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군체는 이 비유를 통해 AI 알고리즘으로 더 빠르게 연결된 현대 사회가 정작 어디로 향하는지 묻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가 꽤 날카롭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원래 좀비 영화에서 진짜 공포는 좀비보다 고립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군상이라고 늘 느껴왔는데, 군체는 좀비 자체에 집중한 탓에 그 인간 드라마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얇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평일 조조였는데도 관객이 꽤 있었고, 제79회 칸 영화제 공식 초청작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붙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지현, 지창욱, 구교환, 고수, 신현빈, 김신록까지 사실상 전원이 주연급 연기력을 가진 캐스팅이라는 점도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요인입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였는데, 이건 OTT로 봤다면 절반밖에 못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영화 내내 들었습니다. 좀비 군체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와 스크린 가득 채워지는 장면들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다시 확인시켜 줬습니다. 좀비가 진화한다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기존 좀비 영화들과 급이 다르고, 실제 과학 개념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세계관이라 설득력도 있습니다.
아쉽게도 앞부분을 놓쳐서인지,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직도 맴돌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와 함께 좀비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상상까지 할 정도로 군체는 좀비라는 장르에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킬링타임 이상의 가치를 원한다면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6RI7hdc2Jo